전동화와 SDV의 거대한 파고 속, 소비자는 이제 기술의 화려함이 아닌 ‘현실적 가치’에 투표하기 시작했다.
지난 몇 년간 시장을 지배했던 막연한 낙관론과 급격한 캐즘(Chasm, 일시적 수요 정체)에 대한 공포는 이제 잦아들고 있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지극히 현실적인 소비자의 잣대다.
이제 소비자는 단순히 기술의 선도성만을 보고 지갑을 열지 않는다. 가격, 충전 편의성, 그리고 내 삶에 얼마나 밀착된 소프트웨어를 제공하느냐가 구매 결정의 핵심으로 이동했다.
2026년 우리 앞에 펼쳐질 자동차 시장의 지형도를 그려본다.
1. 완만한 회복세 속의 질적 변화
한국자동차모빌리티산업협회(KAMA)의 전망에 따르면, 2026년 신규 등록 대수는 전년 대비 약 0.8% 증가한 169만 대 수준에 머물 것으로 보인다.
수치상으로는 정체에 가깝지만 내부를 들여다보면 질적인 변화가 거세다. 고금리와 경기 불확실성이 여전한 가운데, 시장은 폭발적인 성장보다 내실을 다지는 ‘완만한 회복 국면’에 진입했다.
2. 전기차, ‘캐즘’을 넘어 ‘안착’으로
2025년 12% 수준에 머물던 전기차(BEV) 판매 비중은 2026년 15~18%까지 확대될 전망이다. 이는 단순히 신차 효과 때문이 아니다. 정부가 전기차 보조금 예산을 20% 증액하며 지원 사격에 나섰고, 완성차 업체들이 가격 저항선을 낮추기 위해 공격적인 프로모션을 펼친 결과다.
특히 테슬라가 주도해온 시장에 30여 개 이상의 국내외 브랜드가 신규 모델을 쏟아내며 ‘골라 타는 재미’가 본격화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보조금의 조기 소진을 막기 위한 정부의 안정적인 집행 여부가 시장 안착의 마지막 퍼즐이 될 것이다.
3. 하이브리드의 화려한 전성기와 ‘EREV’의 등장
전기차로 가는 징검다리였던 하이브리드(HEV)는 이제 시장의 확고한 ‘메인스트림’이 됐다.특히 주목할 것은 2세대 플러그인 하이브리드(PHEV) 및 주행거리 연장형 전기차(EREV)의 역습이다.
현대차와 기아가 선보일 전기 주행거리 100km 내외의 차세대 모델들은 충전 스트레스에서 자유롭고 싶은 소비자들에게 완벽한 대안을 제시한다.
여기에 2025년 신차 모멘텀 부족으로 고전했던 KG모빌리티와 르노코리아가 하이브리드 라인업을 차급별로 촘촘히 확장하며 시장 점유율 방어에 나설 모습도 관전 포인트다.
4. 유통의 대변혁: 온라인 직판의 확산
수입차 시장의 유통 구조도 요동치고 있다. 테슬라와 폴스타가 연 온라인 판매의 길을 메르세데스-벤츠가 2026년 상반기부터 단계적으로 따를 전망이다. 이는 영업 사원과의 협상에 따라 가격이 달라지던 ‘고무줄 가격’ 시대의 종말을 의미한다.
전국 단일 가격제의 확산은 BMW와 아우디 등 경쟁 브랜드에도 연쇄적인 영향을 미쳐, 자동차 구매 경험 자체를 디지털 중심으로 재편할 것이다.
5. 소프트웨어가 차의 가치를 결정하는 SDV 시대
2026년은 소프트웨어 중심 자동차(SDV)와 무선 업데이트(OTA)가 표준이 되는 원년이다. 신차의 90% 이상이 OTA 기능을 탑재하며, 이는 단순히 내비게이션 업데이트를 넘어 차량의 성능과 편의 사양을 실시간으로 진화시킨다.
테슬라의 FSD(Full Self-Driving) 유료 구독이 국내에서 안착함에 따라, 현대차그룹 역시 기능 구독(FoD) 모델을 본격화할 전망이다. 시트 열선이나 인포테인먼트 기능을 구독하는 방식은 소비자에게 생소할 수 있지만, 제조사에게는 새로운 수익원이자 중고차 잔존 가치를 방어하는 핵심 수단이 될 것이다.
6. 거세지는 ‘차이나 인베이전(China Invasion)’
중국 브랜드의 공습은 이제 현실이 됐다. BYD는 소형 EV ‘돌핀(Dolphin)’을 앞세워 국내 소형차 및 경차 시장을 빠르게 잠식하고 있다. 가격 경쟁력은 물론, 스마트폰 못지않은 빠른 상품 개선 주기는 국내 업체들에게 위협적이다.
여기에 지리(Geely) 그룹의 프리미엄 브랜드 ‘지커(Zeekr)’가 가세한다. 중형 SUV ‘7X’를 앞세운 지커는 ‘중국차는 저렴하다’는 편견을 깨고 제네시스와 직접 경쟁하는 프리미엄 전략을 취할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성패는 샤오미, 샤오펑 등 대기 중인 다른 중국 브랜드들의 한국행 급행 티켓이 될 가능성이 높다.
결론: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균형’
기술은 쉼 없이 진화하지만, 결국 시장을 완성하는 것은 소비자의 선택이다.
2026년 한국 자동차 시장은 화려한 기술의 수사(修辭)를 걷어내고, 어떤 기술이 인간의 삶에 가장 유용한가를 가려내는 엄중한 시험대가 될 것이다.
전동화의 속도에 매몰되기보다 인프라와 가격, 소프트웨어의 안정성이라는 세 마리 토끼를 잡는 기업만이 이 격변의 터널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다.
2026년, 우리 자동차 시장은 비로소 ‘속도’의 시대를 지나 ‘확신’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오종학 기자 fivejh@news-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