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적 프리미엄’이라는 가장 큰 무기를 스스로 내려놓다

‘독일차보다 저렴하지만 상품성은 그에 못지않다.’ 한때 대한민국 유일의 프리미엄 브랜드를 성공 가도에 올려놓았던 필승 공식이었다. 하지만 2025년, 이 공식이 처참히 깨지며 경고등이 켜졌다. 수입차 딜러들의 파격적인 할인 공세 앞에 ‘가성비’라는 강력한 무기가 녹슬면서, 브랜드 출범 이후 가장 혹독한 위기를 맞고 있다.
제네시스 GV80 실내 디스플레이 (출처=제네시스)

‘잘나가던 형님들’의 충격적 성적표



위기는 숫자로 명확히 드러난다. 올해 1월부터 8월까지 제네시스의 누적 판매량은 78,652대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1.4%, 무려 1만 대 이상 판매량이 증발했다. 이 뼈아픈 하락세의 중심에는 브랜드를 이끌던 주력 모델 G80과 GV80이 있다.
제네시스 G80 측정면 (출처=제네시스)
G80은 전년 대비 10.2% 감소했고, 브랜드의 자존심과도 같은 플래그십 SUV GV80의 판매량은 무려 26.1%나 곤두박질쳤다. 한때 도로 위에서 가장 ‘핫한’ 차로 꼽혔던 모델들의 동반 부진은 브랜드 전체에 찬물을 끼얹은 격이다. 그나마 GV70이 고군분투했지만, 거대한 하락의 물결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제네시스 2026 GV80 측정면 (출처=제네시스)

‘가성비’라는 무기가 녹슬었을 때



문제의 본질은 간단하다. 제네시스가 스스로 자신의 성공 공식을 무너뜨렸다는 점이다. 과거 G80은 BMW 5시리즈나 벤츠 E클래스와 비교했을 때, 옵션을 비슷하게 맞추면 1,500만 원 이상 저렴하다는 확실한 가격 우위가 있었다. 소비자들은 이 ‘합리적인 격차’에 기꺼이 지갑을 열었다.
제네시스 G80 블랙 측정면 (출처=제네시스)
하지만 상황은 180도 달라졌다. 제네시스는 연식 변경과 상품성 개선을 이유로 꾸준히 가격을 올렸다. 그 사이, 경쟁자인 BMW와 벤츠는 오히려 1,000만 원을 훌쩍 넘는 공격적인 할인 프로모션을 무기 삼아 고객들을 유혹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제 세 모델의 실구매 가격 차이는 거의 사라지거나, 경우에 따라 역전되는 현상까지 벌어지고 있다. ‘이 돈이면 벤츠, BMW를 살 수 있다’는 소비자의 심리가 제네시스를 떠나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가 된 것이다.
제네시스 GV80 측면 (출처=제네시스)

어? 또 똑같네… ‘두 줄’ 디자인의 딜레마



가격 문제에 더해 수년째 이어지는 ‘패밀리룩’ 디자인에 대한 피로감도 판매 부진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2020년, 두 줄 램프와 거대한 방패 모양 그릴은 신선함 그 자체였다. 하지만 이후 등장한 모든 라인업이 거의 동일한 디자인 코드를 복제하면서 브랜드만의 개성과 신선함이 희석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G80 전기차(출처=제네시스)
소비자 입장에서는 몇 년째 똑같은 디자인의 차를, 심지어 더 비싸진 돈을 주고 사야 하는 셈이다. 특히 수입차 브랜드들이 세대 변경을 통해 파격적인 디자인 변화를 시도하는 것과 대조되며 식상함은 더욱 크게 느껴진다.
제네시스 GV80 후면 (출처=제네시스)
이제 제네시스는 중대한 기로에 섰다. ‘가성비’라는 안전장치 없이, 오롯이 브랜드의 가치와 매력만으로 독일 프리미엄 브랜드와 정면승부를 펼쳐야 하는 시험대에 오른 것이다. 곧 출시될 플래그십 SUV ‘GV90’과 같은 완전 신차를 통해 지금의 위기를 돌파하고 새로운 성공 공식을 써 내려갈 수 있을지, 대한민국 유일 프리미엄 브랜드의 미래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