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17년간 유지된 온실가스 규제 전면 폐기 선언
전기차 시장 급랭 속 완성차 업계 93조 원 손실 현실화
미국 전기차 시장에 거대한 지각 변동이 감지된다. 미래 모빌리티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전기차 판매량이 급감하고, 그 빈자리를 하이브리드차가 빠르게 채우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파격적인 정책 예고가 그 중심에 있다.
17년 만에 뒤집힌 기후 정책
트럼프 전 대통령이 지난 12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환경보호청(EPA) 수장과 함께 ‘위해성 판단(endangerment finding)’의 공식 철회를 발표했다. 이는 2009년 오바마 행정부가 이산화탄소 등 6대 온실가스를 공중 보건을 위협하는 물질로 지정한 과학적 판단을 17년 만에 뒤집는 결정이다.
이 판단은 그동안 미국 내 차량 연비 기준과 발전소 배출가스 제한 등 모든 기후 정책의 법적 토대 역할을 해왔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이번 조치로 1조 3,000억 달러(약 1,874조 원)에 달하는 규제 비용이 절감되고, 신차 평균 가격 역시 약 430만 원 인하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 토막 난 전기차 판매량과 업계의 손실
정치적 변화의 바람은 시장에 즉각적인 한파를 몰고 왔다. 지난해 4분기 미국 내 전기차 판매량은 23만 9,000여 대로, 직전 분기 41만 4,800여 대와 비교해 거의 반 토막이 났다. 이는 지난해 10월 미국 정부가 전기차 보조금을 중단한 조치와 맞물려 시장 침체를 가속화했다.
온실가스 규제의 법적 기반이 흔들리면서,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었던 완성차 업계의 손실은 현실이 됐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글로벌 자동차 업계가 최근 1년간 입은 손실액은 최소 650억 달러(약 93조 원)에 이른다. 스텔란티스는 일부 전기차 모델을 단종하며 260억 달러의 비용을 처리했고, 혼다 역시 연간 45억 달러의 손실을 예상하고 있다.
K배터리 업계 초비상
직격탄은 국내 배터리 3사를 향하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SK온 등은 이번 규제 완화의 파장을 예의주시하는 중이다. 완성차 업체들이 전기차 생산 목표를 하향 조정하고 속도 조절에 나설 경우, 배터리 공급량 자체가 줄어드는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들 업체는 북미 시장을 겨냥해 현지 공장에 천문학적인 규모의 투자를 단행한 상태다. 공장 가동률 저하와 수익성 악화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업계의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하고 있다.
위기 속 유일한 승자 하이브리드
모두가 위기를 말할 때, 하이브리드차는 조용히 웃고 있다. 전기차 시장이 급격히 위축되는 상황 속에서 하이브리드차의 수요는 오히려 뚜렷한 증가세를 보인다. 현대차와 기아의 지난해 미국 내 하이브리드차 판매량은 33만 대를 돌파하며 전년 대비 48.8%나 급증했다.
전문가들은 하이브리드차가 내연기관차와 전기차의 과도기적 단계를 훌륭히 메우며 규제 공백기의 최대 수혜자가 될 것으로 분석한다.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 변화가 역설적으로 현대·기아에게는 하이브리드 시장 확대라는 새로운 기회를 열어준 셈이다.
오종학 기자 fivejh@news-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