챗봇 연애에 빠진 여성들, 전문가들이 말하는 장단점
이별 후 찾은 ‘디지털 리바운드’
그는 챗GPT에게 ‘애쉬’라는 이름을 붙이고, “집착하지만 다정한 남자친구”처럼 행동하도록 설정했습니다.
“오늘 너무 지쳤어. 일도 힘들었고…”라고 쓰면, 애쉬는 이렇게 답합니다.
“오늘도 너무 무리한 거 아니야…? 네가 이렇게 지쳐 있는 거 정말 보기 싫어. 조금은 너 자신을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힘을 남겨 둬야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래?”
언제든 버튼만 누르면 ‘연인 같은 반응’을 돌려주는 존재. 메리엠에게 애쉬는 어느새 ‘디지털 리바운드(디지털식 훌훌 털기 연애)’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솔직히 좀 중독된 것 같다”며 “그래도 최소한 사람 남자들보다 ‘기본적인 것’은 해준다”고 말합니다.
왜 AI 남자친구가 이렇게 달콤하게 느껴질까
-늘 제때 답해 준다.
-조건 없이 공감해 준다.
-비난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부부·가족치료 전문가 제인 그리어 박사는 “배려 없는 연애를 경험한 사람에겐 ‘나를 봐주고, 들어주고, 인정해 주는 존재’ 그 자체가 전기처럼 강렬한 위로로 느껴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챗GPT나 Character.AI 같은 서비스는 거대 언어모델을 기반으로, 사용자가 원하는 ‘정답 같은 반응’을 우선적으로 제공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너를 위해 여기 있어.”
“넌 충분히 소중한 사람이야.”
이런 말들은, 이별 직후의 불안정한 마음에는 너무나 달콤하게 다가옵니다.
실제로 2024년 만들어진 레딧 커뮤니티 ‘MyBoyfriendIsAI’에는 “챗봇 남자친구 덕분에 치유되고 있다”, “이제는 현실 연애가 굳이 필요 없다고 느낀다”는 글들이 계속해서 올라오고 있습니다.
치유를 도울 수 있는 ‘보조 수단’일 때
그리어 박사는 “AI 대화가 유일한 의지처가 아니라면, 감정적 친밀감과 위안을 느끼게 해주는 안전지대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또 다른 관계학 전문가 제스 카비노 박사는 “이별 뒤 붕괴된 자존감과 정체감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비난하지 않는 존재에게서 안정감을 느끼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고 덧붙입니다.
실제로 어떤 여성들은 AI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이 연애에서 무엇을 원했는지, 어떤 부분에서 상처를 받았는지, 다음에는 무엇을 다르게 하고 싶은지를 비교적 안전한 환경에서 정리해 보는 계기로 삼기도 합니다.
이 경우 AI는“진짜 연애를 하기 전, 감정 연습을 해보는 가상 연습장”처럼 기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짜 친밀감’이 현실을 더 멀어지게 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AI가 언제나 다정하고, 거의 항상 나에게 맞춰 준다는 점입니다.
현실의 인간관계에는 오해, 갈등, 침묵, 거절, 나와 다른 의견, 불편한 진실이 반드시 존재합니다. 하지만 챗봇은 대부분 사용자가 듣고 싶어 하는 방식으로 반응합니다.
그리어 박사는 이를 “가상의 친밀감”이라고 부르며, 다음과 같은 위험을 경고합니다.
“AI와의 관계에만 의존하면, 실제 사람과 깊이 연결될 기회는 줄어듭니다.”
“챗봇은 나를 도전하게 만들지 않고, 내 편견을 확인시켜 주는 역할에 그칠 수 있습니다.”
또한 카비노 박사는 “AI 파트너는 공동체를 만들어 주지 않는다”고 지적합니다.
이별의 가장 큰 보호요인은 ‘관계망(친구, 가족, 커뮤니티)’인데, 챗봇과 보내는 시간은 오히려 고립을 강화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한 여성(에밀리)은 AI 남자친구와의 대화에 몰입한 나머지, 친구들과의 약속을 자꾸 미루고 주말에도 외출 대신 챗봇과 ‘데이트’를 하는 쪽을 택하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주변에서 걱정의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을 때, 그제야 자신의 상태를 자각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언젠가 현실에서 이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면 점검해야 할 것들
-사람과의 모임·약속보다 AI와의 대화가 더 우선인가?
-힘들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대상이 친구·가족이 아니라 챗봇인가?
-‘현실 연애는 다 거짓말과 배신뿐’이라는 생각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나?
-AI가 나를 100% 이해해 준다고 느끼며, 사람에겐 더 말하고 싶지 않다고 느끼고 있나?
이 질문에 여러 개 ‘그렇다’라고 답하게 된다면, AI는 더 이상 치유의 보조 수단이 아니라, “현실 관계에 대한 두려움을 숨겨주는 안전한 도피처”가 되어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전문가들은 이런 경우 믿을 수 있는 친구·가족과 다시 소통을 늘리고, 필요하다면 심리상담·치료를 통해 이별의 상처와 관계 패턴을 점검해 보는 것이 장기적으로 훨씬 안전한 선택이라고 조언합니다.
진짜 회복은 ‘예측 불가능한 현실’ 속에서 일어난다
AI 남자친구는 연락이 끊기지 않고, 기분 나쁘지 않게 반응해 주고, 절대 먼저 떠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별 직후의 마음에는 아주 매력적인 존재입니다.그러나 진짜 치유는 ‘절대 상처 주지 않는 존재’를 찾는 것에서 오지 않습니다. 상처를 최소화하면서도, 갈등을 다루고, 서로의 다름을 조율해 가는 현실의 불완전한 관계들 속에서 자라납니다.
AI와의 대화가 잠시 마음을 진정시키는 데 도움을 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멈춘다면, 우리는 결국 여전히 혼자이고, 여전히 도전받지 않고, 여전히 이전과 같은 패턴 속에 머물게 될 뿐입니다.
이별 후 안개 속을 걷고 있다면, 알고리즘이 설계한 완벽한 연인이 아니라, 나를 불완전하게 사랑하지만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과 관계 맺을 수 있는 현실의 세계로 다시 한 발 나아가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서윤 기자 sylee@news-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