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 거리 예술가, ‘풍선을 든 소녀’ 작가 뱅크시
로이터 “브리스틀 출신 51세 남성”

세계 미술계 최대 미스터리로 불리던 거리 예술가 뱅크시(Banksy)의 정체가 영국 브리스틀 출신 그라피티 아티스트 로빈 거닝엄(Robin Gunningham)일 가능성이 크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수십 년 동안 익명으로 활동하며 정치와 사회를 풍자하는 작품을 남긴 그는 ‘얼굴 없는 화가’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현대 미술계의 상징적인 인물로 자리 잡아 왔다.
사진=생성형이미지
로이터 조사로 드러난 결정적 단서

로이터 통신은 최근 자체 탐사 보도를 통해 뱅크시의 정체가 1973년 영국 브리스틀에서 태어난 그래피티 예술가 로빈 거닝엄일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보도에 따르면 조사팀은 경찰 기록, 여행 기록, 인터뷰, 기업 문서 등 다양한 자료를 수년간 분석한 끝에 이러한 결론에 도달했다.

특히 우크라이나에서 발견된 벽화 작업이 중요한 단서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2022년 러시아의 공격으로 파괴된 키이우 인근 호렌카 마을에서 뱅크시의 작품이 등장했는데, 당시 작업 현장을 목격한 주민들의 증언이 조사에 큰 역할을 했다. 주민들은 얼굴을 가린 두 남성이 스텐실과 스프레이를 이용해 몇 분 만에 작품을 완성했다고 증언했다.

또 현장에 함께 있던 한 남성은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자일스 둘리로 확인됐으며, 그는 2011년 아프가니스탄에서 폭발 사고로 팔과 다리를 잃은 인물이다. 이들과 함께 우크라이나에 입국한 인물 가운데 ‘데이비드 존스’라는 이름의 남성이 있었는데, 해당 인물의 생년월일이 로빈 거닝엄과 동일한 것으로 확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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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변경과 과거 기록도 연결

로이터는 거닝엄이 2008년 자신의 신원이 언론에 의해 거론되기 시작하자 이름을 ‘데이비드 존스’로 바꿨을 가능성이 높다고 전했다. 이 이름은 영국에서 매우 흔한 이름으로 알려져 있어 정체를 숨기기 위한 선택이었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또한 2000년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광고판을 훼손한 혐의로 체포된 사건 역시 중요한 단서로 꼽힌다. 당시 경찰 기록과 법원 문서에는 로빈 거닝엄이라는 이름이 남아 있었으며, 해당 사건은 패션위크 기간 중 옥상 광고판을 변형하려다 적발된 사례였다. 조사 결과 당시 체포된 인물이 뱅크시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뱅크시의 정체를 둘러싼 추측은 그동안 꾸준히 이어져 왔다. 영국 밴드 매시브 어택의 멤버 로버트 델 나자, 거리 예술가 티에리 구에타 등 여러 인물이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그러나 로이터는 이번 조사에서 다양한 문서와 이동 기록, 주변 인물들의 증언을 종합적으로 분석한 결과 로빈 거닝엄이라는 특정 인물과 연결되는 증거가 상당 부분 축적됐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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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을 지켜온 이유와 미술계 영향

다만 뱅크시 본인이나 그의 공식 기관은 이번 보도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뱅크시의 작품 인증 기관인 페스트 컨트롤 오피스(Pest Control Office)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입장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뱅크시 측 변호사 마크 스티븐스 역시 성명을 통해 조사 내용의 일부가 부정확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익명 활동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뱅크시는 오랫동안 집요하고 위협적인 행동의 대상이 되어 왔다”며 “익명 또는 가명으로 활동하는 것은 정치나 사회 문제를 보복이나 검열의 두려움 없이 표현할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장치”라고 설명했다.

1990년대 영국 브리스틀 거리에서 활동을 시작한 뱅크시는 스텐실 기법을 활용한 그래피티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전쟁과 소비주의, 난민 문제를 풍자하는 작품들은 거리 벽화에서 시작해 미술관과 경매 시장까지 확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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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작으로는 빨간 하트 모양 풍선을 날려 보내는 소녀를 그린 ‘풍선을 든 소녀(Girl with Balloon)’가 있다. 이 작품은 영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미술 작품 중 하나로 꼽히며, 2018년 경매장에서 낙찰과 동시에 액자 속 장치가 작동해 그림이 파쇄되는 퍼포먼스로 세계적인 화제를 모았다. 이후 작품은 ‘사랑은 쓰레기통에(Love Is in the Bin)’라는 이름으로 다시 공개됐고, 2021년 약 2540만 달러에 낙찰되며 미술 시장에서도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번 보도가 사실로 확인될 경우 수십 년 동안 베일에 싸여 있던 현대 미술계 최대 미스터리가 하나 풀리는 셈이다. 다만 뱅크시 본인이 공식적으로 정체를 인정하지 않는 한, 그의 신비로운 이미지는 당분간 계속 유지될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도 나온다.

김은정 기자 kej@news-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