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차감·정숙성 다 갖추고도 연 3500대 팔린 비운의 세단

현대차가 제네시스를 따로 만든 배경이 여기에 있었다



현대차가 만든 플래그십 세단 ‘에쿠스’는 차량 자체의 완성도만 보면 흠잡기 힘든 차였다. 부드러운 승차감과 정숙성은 당시 다른 고급 브랜드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미국 시장에서의 성적은 초라했다. 2013년 한 해 판매량은 3,500대에 그쳤다. 잘 만든 차가 왜 팔리지 않았을까. 여기에는 높은 가격과 ‘현대’라는 브랜드 이미지가 만든 복잡한 방정식이 숨어 있었다.

당시 에쿠스는 현대차의 기술력을 집약한 모델이었지만, 그 배경이 오히려 발목을 잡는 상황에 놓였다.



차는 좋았지만 가격표가 문제였다



에쿠스 최고급 모델의 미국 현지 가격은 약 7만 달러에 달했다. 한화로 계산하면 약 9,600만 원에 육박하는 금액이다. 문제는 소비자들이 이 가격대에서 ‘현대차’를 선뜻 선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고급차 시장에서 소비자는 단순히 성능이나 편의성만으로 차를 구매하지 않는다. 브랜드가 주는 가치와 상징성에도 큰 비용을 지불한다. 하지만 당시 현대차는 대중적인 자동차 브랜드 이미지가 강했고, 1억 원에 가까운 차를 내놓기에는 브랜드 파워가 부족했다.



미국 시장 내 낮은 인지도도 판매 부진의 한 원인이었다. 판매량이 적어 도로에서 자주 보이지 않았고, 차에 현대차 로고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아 어떤 브랜드인지조차 모르는 소비자가 많았다. ‘그 돈이면 차라리 검증된 독일 브랜드를 사겠다’는 인식이 팽배했던 것이다.

에쿠스의 실패가 제네시스를 낳았다



에쿠스의 고전은 단순히 ‘비싸서 실패했다’는 한 문장으로 요약하기 어렵다. 같은 가격이라도 소비자가 기꺼이 지갑을 여는 브랜드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브랜드의 출발선은 다르다. 에쿠스는 제품의 고급화는 이뤘지만, 브랜드 이미지가 그 가격을 뒷받침하지 못한 대표적 사례다.



이 경험은 현대차에 값비싼 교훈을 남겼다. 결국 현대차는 고급차 라인업을 별도의 브랜드로 독립시키는 결단을 내린다. 바로 ‘제네시스’의 시작이다.

에쿠스의 실패는 단순한 판매 부진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고급차 시장의 생리를 명확히 보여준 사건이자, 제네시스라는 성공적인 브랜드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결정적 배경이 됐다. 에쿠스가 먼저 걸어간 길이 있었기에 제네시스의 길이 열릴 수 있었던 셈이다.



오종학 기자 fivejh@news-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