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수출 대박에 국내 물량 씨말라… 최장 26개월 대기
신차보다 비싼 중고차 등장, 노사 갈등에 증산도 ‘막막’

현대차 캐스퍼 일렉트릭 실내 /사진=현대자동차
지금 계약해도 차 키를 받는 시점은 2028년이다. 농담이 아니다. 반도체 수급난이 해결되면서 대부분의 국산차 출고 기간이 짧게는 3주, 길어야 4개월 수준으로 정상화된 2025년 현재, 유독 한 차종만이 상식을 벗어난 ‘납기 지옥’에 빠졌다. 기아 쏘렌토 하이브리드나 카니발 같은 인기 모델조차 명함도 못 내밀 수준이다.

바로 현대자동차의 경형 SUV ‘캐스퍼’ 이야기다. 신차보다 중고차가 더 비싸게 팔리는 기현상까지 빚어지고 있는 캐스퍼의 출고 대란 배경을 취재했다.

현대차 캐스퍼 /사진=현대자동차

유럽서 대박 난 빈집털이 전략


이러한 비정상적인 출고 적체 현상의 1차적인 원인은 아이러니하게도 글로벌 시장에서의 대성공 때문이다. 캐스퍼의 전기차 모델인 ‘캐스퍼 일렉트릭’은 유럽 시장에서 ‘인스터(Inster)’라는 이름으로 판매되고 있는데, 현지 반응이 가히 폭발적이다.



유럽은 전통적으로 도로 폭이 좁아 소형차 선호도가 높다. 하지만 최근 폭스바겐 등 주요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이 수익성 악화를 이유로 소형차 라인업을 잇달아 단종시켰다. 이 틈새시장을 캐스퍼가 파고든 것이다. 경쟁자가 사라진 ‘빈집’을 완벽하게 공략한 결과, 지난 10월까지 수출 물량만 3만 7,372대를 기록했다.

문제는 생산 능력이다. 위탁 생산을 맡은 광주글로벌모터스(GGM)의 연간 생산 능력은 5만 대 수준인데, 10월 기준 국내외 등록 대수가 이미 5만 대를 넘어서며 공장은 한계치에 도달했다. 유럽 주문량을 맞추느라 국내 물량이 뒤로 밀리는 병목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현대차 캐스퍼 일렉트릭 /사진=현대자동차

노사 갈등에 발목 잡힌 생산 라인


물리적인 한계보다 더 큰 문제는 내부 사정이다. 현재 GGM은 국내 완성차 공장 중 유일하게 주간 ‘1교대’ 근무를 하고 있다. 사측은 몰려드는 주문을 소화하기 위해 연간 20만 대 생산이 가능한 2교대 전환을 시도하고 있지만, 노조의 반대에 부딪혀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누적 생산 35만 대 달성 전 무파업’이라는 노사 상생 협정은 이미 깨진 지 오래다. 잦은 파업으로 생산 라인이 멈춰 서는 동안 주문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현대차 직영 공장이라면 특근이나 다른 공장 물량 조절로 대응하겠지만, 위탁 생산 구조인 GGM은 본사의 개입 여지가 적어 속수무책인 상황이다.
현대차 캐스퍼 일렉트릭 /사진=현대자동차

웃돈 얹어 거래되는 기현상


상황이 이렇다 보니 중고차 시장에서는 전례 없는 가격 역전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엔카닷컴 등 주요 플랫폼에서는 주행거리가 짧은 신차급 캐스퍼 매물이 신차 출고가보다 비싸게 거래된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2년이라는 시간을 돈으로 사는 셈이다.

정직하게 기다리는 계약자들의 불안감은 크다. 2028년 3월에 차량을 받게 될 경우, 그때의 전기차 보조금 정책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기 때문이다. 보조금이 축소되거나 폐지된다면 예상보다 훨씬 비싼 가격에 차를 사야 할 수도 있다.
현대차 캐스퍼 /사진=현대자동차

옵션 하나 넣었더니 대기만 26개월


현대차 공식 납기 정보를 살펴보면 내연기관 모델도 1년 6개월을 기다려야 한다. 전기차 모델은 더욱 심각하다. 기본 20개월 대기에, 인기 있는 ‘투톤 루프’나 ‘무광 컬러’ 옵션을 선택하면 대기 기간은 26개월로 늘어난다. 단순 계산으로도 2028년 봄에나 차를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는 사실상 제조사가 “지금은 주문하지 말라”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다.

기아 모닝이나 레이가 1년 이내에 출고되는 것과 비교하면 캐스퍼의 상황은 매우 이례적이다. 전문가들은 GGM의 2교대 근무 전환이 노사 합의로 안착되기 전까지는 이 ‘납기 지옥’이 해소되기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 당장 차가 필요한 소비자라면 웃돈을 주고 신차급 중고를 찾거나, 출고가 빠른 경쟁 모델로 눈을 돌리는 것이 정신 건강에 이로운 선택이 될 것이다.
현대차 캐스퍼 실내 /사진=현대자동차

한편, 캐스퍼 일렉트릭은 기존 경차 규격보다 차체를 키워 실내 공간을 확보하고, 1회 충전 시 315km라는 넉넉한 주행거리를 확보해 상품성을 인정받았다. 특히 차박이 가능한 공간 활용성과 합리적인 가격 정책이 맞물려 사회초년생뿐만 아니라 세컨드카를 찾는 중장년층에게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서혜지 기자 seog@news-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