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날짜부터 티켓 가격까지 ‘숫자’로 조롱
선배 래퍼들도 결국 고개 숙였다
5월의 끝자락, 힙합계가 한 래퍼의 기행으로 떠들썩하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17주기를 앞두고 벌어진 일이다. 논란의 중심에는 ‘조롱’의 의도가 명백히 담긴 ‘숫자’와 결국 취소된 ‘공연’이 자리 잡고 있다. 그는 직접 고개를 숙였지만, 논란의 불씨는 쉽게 꺼지지 않을 전망이다. 대체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의도된 숫자, 결국 모든 것을 말해주다
문제의 시작은 래퍼 리치 이기(본명 이민서)가 기획한 단독 공연 포스터 한 장이었다. 공연 날짜는 노 전 대통령의 서거일인 5월 23일, 시간은 오후 5시 23분. 심지어 티켓 가격마저 5만 2300원으로 책정됐다. 우연이라고 보기엔 모든 것이 하나의 숫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었다. 그는 이전부터 자신의 음악에 고인의 실명을 직접 거론하거나 서거 방식을 연상시키는 자극적인 표현을 사용하며 논란의 중심에 서 왔다. 이번 공연은 그 연장선이자, 도를 넘은 조롱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걷잡을 수 없는 파장, 예견된 공연 취소
상식을 벗어난 공연 계획이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알려지자 비판 여론이 들끓었다. “선을 넘었다”, “이건 예술이 아니라 모욕이다”와 같은 격한 반응이 쏟아졌다.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노무현재단은 즉각 주최사에 공연 취소와 공식 사과를 요구하는 공문을 발송하며 강력한 유감을 표했다.
관련 내용을 제보받은 공연장 ‘연남스페이스’ 측 역시 빠르게 움직였다. 대관 계약을 맺었던 기획사에 ‘공연 진행 불가’를 통보한 것이다. 여론의 질타와 재단, 공연장의 단호한 대처 앞에 논란의 공연은 결국 무산됐다.
“관심받고 싶었다”, 뒤늦은 사과와 반성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리치 이기는 결국 백기를 들었다. 그는 지난 19일 노무현시민센터를 직접 찾아 자필 사과문을 전달하며 용서를 구했다. 조수진 노무현재단 이사가 공개한 사진 속 그는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있었다.
사과문에는 “데뷔 초부터 유명세를 위해 고인을 조롱하고 비하하는 언행을 일삼았다”며 “사회적 책임을 배제한 부주의한 판단이었다”는 반성의 내용이 담겼다. 그저 재미와 관심 끌기였다는 변명은 더 큰 실망만을 안겼다.
자신을 응원하던 팬에게 티켓을 팔고 공연을 준비하던 아티스트의 행동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따른다. 단순한 팬심으로 공연을 예매했던 사람이라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파장은 함께 무대에 오르기로 했던 동료 래퍼들에게까지 번졌다. 베테랑 래퍼 팔로알토는 SNS를 통해 “고인을 조롱하거나 혐오적 표현에 동의하지 않는다”며 “표현의 문제성과 그것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수 있는지 충분히 생각하지 못했다. 저의 부족한 인식에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딥플로우 역시 “DM으로 욕이 와서 자초지종을 파악했다”면서 “그 숫자의 의미를 전혀 몰랐다. 상식선에서 몹시 화가 나고 황당하다”며 선을 그었다. 몰랐다는 해명에도 불구하고, 한 래퍼의 잘못된 선택이 힙합계 전체의 이미지에 흠집을 남긴 것은 분명해 보인다.
조선미 기자 jsmg@news-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