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들 한국 들기름 캐리어째 담아간다
건강식 열풍 “몸에 좋고 맛도 다르다”
K-팝과 K-뷰티를 넘어 이제는 ‘K-로컬 식문화’가 해외 관광객의 소비를 움직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단순한 식재료였던 들기름은 건강식 이미지와 현지 체험 요소가 결합되며 예상 밖의 글로벌 인기를 누리는 분위기다.
최근 엑스(X)와 인스타그램 등 SNS에는 서울 전통시장 기름집 방문 인증 사진과 영상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일본인 관광객들은 “원하는 양만큼 주문하면 바로 압착해 병에 담아준다”, “마트에서 파는 기름과 차원이 다르다”, “병을 여는 순간 향이 확 퍼진다” 같은 후기를 남기며 한국 기름집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특히 중부시장, 광장시장 등 오래된 전통시장 안 방앗간들이 일본 관광객들의 필수 방문 코스로 떠오르고 있다. 일부 유명 기름집은 하루 수백 명의 일본인이 찾을 정도로 붐비는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에서는 특히 20~30대 여성 관광객 비중이 높다고 분석한다.
이 같은 인기는 단순히 ‘맛있는 기름’ 때문만은 아니다. 일본 관광객들이 열광하는 핵심 포인트는 ‘즉석 압착 경험’이다. 참깨와 들깨를 낮은 온도에서 천천히 볶은 뒤 주문 즉시 기름을 짜 병에 담아주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관광 콘텐츠로 소비되고 있는 것이다.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제품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신선한 향과 풍미, 눈앞에서 완성되는 제조 과정, 시장 골목 특유의 분위기가 모두 결합되며 ‘로컬 체험형 여행’의 상징처럼 자리 잡고 있다는 평가다.
실제로 최근 일본 젊은층 사이에서는 프랜차이즈나 백화점 쇼핑보다 전통시장, 골목 상권, 노포를 방문해 현지인의 생활 문화를 직접 경험하는 여행 방식이 인기를 끌고 있다. 한국 여행에서 ‘진짜 한국 사람처럼 먹고 즐기는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위기가 강해졌다는 것이다.
들기름의 인기가 커진 또 다른 이유는 건강식 이미지다. 일본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오메가3 지방산이 풍부한 식품으로 들기름이 주목받아 왔다. 최근에는 “한국 들기름이 특히 향이 깊고 고소하다”는 입소문이 퍼지며 선물용과 기념품 수요까지 크게 늘어나는 분위기다.
가정의학과 전문의 이동환 원장은 유튜브 채널 ‘교육하는 의사’를 통해 “꾸준히 먹으면 만성염증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되는 대표적인 음식이 오메가3가 풍부한 식품”이라며 “생선뿐 아니라 들깨와 들기름도 좋은 선택”이라고 설명했다.
들깨와 들기름에는 식물성 오메가3 계열 지방산인 알파-리놀렌산(ALA)이 풍부하다. 농촌진흥청에 따르면 알파-리놀렌산은 염증을 줄이고 콜레스테롤 개선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성분으로 알려져 있다. 혈관 건강과 두뇌 건강에 관심이 높은 중장년층뿐 아니라, 건강한 식습관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젊은 세대까지 관심을 보이는 이유다.
특히 최근 일본에서는 ‘몸속 염증 관리’와 ‘클린 식단’ 트렌드가 확산되며 자연식 재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한국 전통 방식으로 짜낸 들기름이 건강하고 신선한 식재료라는 이미지를 얻게 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국내 누리꾼들 역시 “외국인들이 진짜 맛있는 걸 알아본다”, “이젠 방앗간도 관광지가 됐다”, “들기름 가격 오르는 거 아니냐” 같은 반응을 보이며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다만 건강에 좋다고 알려진 들기름도 보관을 잘못하면 오히려 문제가 될 수 있다. 들기름은 빛과 열에 약해 산패가 빠르게 진행되는 식품으로 꼽힌다.
전문가들은 들기름을 개봉한 뒤에는 직사광선을 피하고 냉장 보관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한다. 오래 실온에 두거나 햇빛이 드는 공간에 보관할 경우 산패 속도가 빨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국제 학술지 ‘영양 생화학 저널’에 실린 연구에서는 산패된 오메가3 지방산을 섭취할 경우 체내 염증 지표와 스트레스 지수가 높아질 수 있다는 결과도 보고됐다. 단순히 맛과 향이 떨어지는 수준이 아니라 건강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의미다.
또 들기름은 향이 강한 편이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어 처음 접하는 사람이라면 비빔국수, 나물무침, 계란밥 등에 소량씩 활용하는 방식이 추천된다. 실제 일부 기름집에서는 일본 관광객들이 활용도가 높은 참기름을 함께 구매하는 경우도 많다고 전했다.
업계에서는 이번 현상을 단순한 식재료 유행 이상으로 보고 있다. K-팝과 K-드라마로 시작된 한류가 이제는 한국인의 생활문화와 식습관, 재래시장 경험까지 확장되고 있다는 것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예전에는 한국에 오면 화장품이나 패션 제품을 사 갔다면, 이제는 한국인의 일상적인 먹거리와 생활 자체를 경험하려는 관광객이 많아졌다”며 “앞으로는 이런 로컬 체험형 소비가 한국 관광의 핵심 경쟁력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김은정 기자 kej@news-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