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연기관은 ‘질주’, 전기차는 ‘급정거’…엇갈린 희비 속 숨겨진 진실

기아의 플래그십 전기 SUV, EV9이 지난 5월 미국 시장에서 단 37대 판매라는 충격적인 성적표를 받았다. 전 세계 자동차 상을 휩쓸며 찬사를 받았던 모델이기에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아이러니하게도 기아의 미국 전체 판매량은 오히려 늘어난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라 더욱 의문을 자아낸다.
기아 EV9 GT 측정면 (출처=기아)
형님 먼저?…K5·카니발이 이끈 ‘내연기관의 역습’

기아의 5월 실적은 K5와 카니발 등 내연기관 모델들이 그야말로 ‘하드캐리’했다. 전기차의 부진을 메우고도 남아 전체 판매량을 5.1%나 끌어올리는 저력을 보였다.

특히 중형 세단 K5는 판매량이 무려 257% 폭증하며 ‘역주행의 아이콘’으로 떠올랐고, ‘아빠들의 드림카’ 카니발 역시 70% 가까운 성장세로 힘을 보탰다. 스포티지, 텔루라이드 등 주력 SUV들도 꾸준한 인기를 과시하며 내연기관의 건재함을 증명했다.
기아 더 뉴 K5 (출처=기아)
알고 보니 ‘개점휴업’…외면이 아니라 없어서 못 팔았다

판매량 98.3% 급감. 숫자만 보면 소비자들이 EV9에 완전히 등을 돌린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진실은 다르다. 이유는 바로 ‘재고 부족’이다.

2026년형 신모델 출시를 앞두고 기존 2025년형 모델의 재고가 모두 소진되면서, 팔고 싶어도 팔 차가 없는 일시적인 ‘개점휴업’ 상태에 빠졌던 것이다. 소비자의 외면이 아닌, 공급 공백이 빚어낸 해프닝에 가까웠다.
EV9 (출처=기아)
기아는 곧 출시될 2026년형 EV9의 가격을 최대 274만원 인하하고, 테슬라 충전 방식(NACS)을 도입하는 등 상품성을 개선해 반격을 준비하고 있다.

경쟁자는 웃는다…‘보조금’ 등에 업은 현대차의 질주

기아가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경쟁자인 현대차는 대형 전기 SUV 아이오닉 9으로 공세의 고삐를 당기고 있다. 미국 현지 생산을 통해 최대 1000만원에 달하는 보조금(IRA) 혜택을 받으며 가격 경쟁력을 확보한 것이 핵심이다.
아이오닉9(사진=현대차그룹 제공)
유력 매체들이 ‘2025년 기대되는 신차’로 선정하는 등 현지 반응도 뜨거워, EV9이 잠시 비운 자리를 빠르게 파고들고 있다.

이번 기아의 5월 실적은 시장의 흐름과 공급 전략이 맞물려 만들어낸 극적인 결과다. EV9의 37대라는 숫자는 단순한 부진이 아닌, 더 큰 도약을 위한 ‘숨 고르기’였던 셈이다. 재정비를 마친 EV9이 다시금 ‘올해의 차’다운 명성을 되찾을 수 있을지, 앞으로의 행보가 더욱 흥미로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