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능=국산’ 공식 파괴…1원이라도 더 싸게 만들려는 절박함

기아의 신형 전기차 EV5가 오는 9월, 중국 CATL 배터리를 탑재하고 국내에 출시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업계가 술렁이고 있다. ‘고성능 NCM 배터리는 국산’이라는 불문율이 깨진 첫 사례로, 전기차 시장의 치열한 가격 경쟁이 K-배터리의 텃밭마저 위협하기 시작했다.
기아 EV5 측정면 (출처=기아)
그동안 국내 전기차 시장에는 암묵적인 공식이 있었다. 가격이 중요한 보급형 모델에는 저렴한 중국산 LFP(리튬인산철) 배터리를, 주행거리와 성능이 중요한 주력 모델에는 기술력이 뛰어난 국산 NCM(니켈·코발트·망간) 배터리를 쓴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아는 주력 준중형 SUV인 EV5에 과감히 중국산 NCM 배터리를 탑재하기로 결정하며 이 공식을 스스로 파괴했다.

왜 ‘K-배터리’가 아닌 ‘C-배터리’인가?기아의 이번 선택은 ‘절박함’이라는 한 단어로 요약된다. 전기차 수요가 잠시 주춤하는 ‘캐즘’ 현상과 매년 줄어드는 정부 보조금 속에서, 어떻게든 차 값을 낮춰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위기감이 반영된 것이다.
기아 EV5 측면 (출처=기아)
세계 1위 배터리 기업인 중국 CATL의 제품을 사용함으로써 원가를 절감하고, 이를 통해 EV5의 판매 가격을 최대한 낮춰 소비자들의 구매 문턱을 허물겠다는 강력한 의지로 풀이된다. 소형차가 아닌, 시장의 허리를 담당하는 주력 모델에 이런 결정을 내렸다는 것은 그만큼 상황이 시급하다는 방증이다.

국내 배터리 업계의 위기? 현대차의 큰 그림?이번 결정은 국내 배터리 3사(LG에너지솔루션, SK온, 삼성SDI)에게는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안방으로 여겨졌던 내수 시장 주력 모델까지 중국에 내줄 수 있다는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EV5를 시작으로 향후 출시될 중형, 대형 전기차에도 중국산 배터리가 확대 적용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기아 EV5 실내 (출처=기아)
하지만 현대차그룹 입장에서는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분석도 있다. 특정 업체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CATL과 같은 거대 기업과도 협력 관계를 유지해야만, 안정적인 공급망을 확보하고 가격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글로벌 시장 공략을 위한 필수적인 생존 전략의 일환이다.

그래서, 소비자에게는 좋은 건가?결론부터 말하면, 소비자 입장에서는 반가운 소식이다. 배터리의 ‘국적’을 따지던 시대는 저물고, 이제는 오직 ‘성능’과 ‘가격’으로만 평가받는 무한 경쟁 시대가 열렸기 때문이다.
기아 EV5 측후면 (출처=기아)
제조사들의 치열한 원가 절감 노력과 기술 경쟁은 결국 더 저렴하면서도 성능이 뛰어난 전기차의 등장을 앞당길 것이다. 기아 EV5의 중국산 배터리 채택은 이러한 시장 변화를 알리는 중요한 신호탄이다. 이제 소비자들은 국적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에게 가장 큰 가치를 제공하는 최고의 전기차를 선택하기만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