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경차 시장 위기, 역대 최악의 판매 절벽 직면 “연비왕은 옛말” 준중형보다 못한 효율에 소비자 외면 캐스퍼 일렉트릭의 ‘체급 변경’으로 신차 효과마저 실종
현대차 캐스퍼 일렉트릭 실내 (출처=현대차)
한때 ‘국민 첫 차’이자 고유가 시대의 구세주로 불렸던 국내 경차 시장이 그야말로 꽁꽁 얼어붙었다. 화려한 디자인의 신차가 나와도 지갑을 열지 않는 소비자들 때문에, 연간 판매량 10만 대라는 심리적 저지선마저 무너질 위기다. 도대체 왜 한국인들은 그토록 사랑했던 ‘작은 차’를 외면하게 된 걸까.
역대급 판매 빙하기, 숫자가 말해주는 위기
국내 완성차 업계의 성적표는 참담하다. 올해 1월부터 10월까지 국내 경차 시장 판매량은 고작 6만 대 수준에 머물렀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 8만 2천여 대가 팔렸던 것과 비교하면 무려 27.3%나 곤두박질친 수치다.
현대차 2026 캐스퍼 일렉트릭 측면 (출처=현대차)
이런 흐름이라면 올해 연간 판매량은 7만 대를 겨우 넘길 것으로 보인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연 13만 대 이상 팔리며 쌩쌩 달렸던 시장이 쉐보레 스파크 단종 이후 급격히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셈이다. 단순히 ‘큰 차’를 선호하는 유행 때문이라고 치부하기엔 뼈아픈 내부 사정들이 있다.
첫 번째 배신, “경차가 기름을 더 먹는다고?”
소비자들이 등을 돌린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경제성의 배신’이다. 흔히 경차 하면 ‘기름 냄새만 맡아도 간다’는 환상이 있었다. 하지만 기술이 발전한 요즘, 이 공식은 처참히 깨졌다.
현대차 더 뉴 캐스퍼 측후면 (출처=현대차)
실제 데이터를 비교해 보면 그 충격은 더하다. 현대차의 경형 SUV 캐스퍼 가솔린 1.0 터보 모델(17인치 타이어 기준)의 공인 복합연비는 리터당 12.3km다. 반면, 한 체급 위인 준중형 세단 아반떼 1.6 가솔린 모델(16인치 타이어 기준)은 리터당 15.3km를 달린다.
[주요 연비 비교] 현대 캐스퍼 (1.0 터보): 12.3km/L
현대 아반떼 (1.6 가솔린): 15.3km/L -> 결과: 아반떼가 리터당 3km를 더 주행, 경차의 연비 효율성 상실
현대차 캐스퍼 일렉트릭 측정면 (출처=현대차)
작은 차체에 무거운 짐을 싣고 힘을 짜내야 하는 경차 엔진의 숙명 탓이다. 취득세 감면이나 통행료 할인 같은 혜택이 있다 해도, 매일매일 주유소에서 체감하는 연비의 열세는 알뜰한 운전자들에게 큰 박탈감을 주고 있다.
두 번째 장벽, 패밀리카로 쓰기엔 너무 좁은 그대
한국 자동차 시장에서 ‘공간’은 곧 ‘권력’이다. 나 홀로 라이프를 즐기는 1인 가구가 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자동차는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타는 공간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캐스퍼 일렉트릭 (출처=현대차)
경차는 태생적으로 물리적 공간의 한계가 명확하다. 차박이나 캠핑 같은 아웃도어 활동이 일상이 된 요즘, 짐을 싣기도 벅차고 뒷좌석에 누군가를 태우기도 미안한 경차의 좁은 실내는 치명적인 단점이다. 제조사들이 아무리 공간을 뽑아낸다 해도, SUV가 주는 넉넉함과는 비교우위를 점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세 번째 악재, 사고 싶어도 살 차가 없다
선택지가 말라버린 시장 환경도 불난 집에 부채질을 했다. 쉐보레 스파크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 뒤, 시장은 기아 레이와 모닝, 현대 캐스퍼라는 삼각편대로 좁혀졌다. 경쟁이 사라지니 시장의 활력도 떨어졌다.
레이 EV 측정면 (출처=기아)
여기에 최근 출시된 ‘캐스퍼 일렉트릭’은 경차 시장에 묘한 충격을 안겼다. 전기차 배터리 공간 확보를 위해 차체를 키우다 보니 법적 기준을 초과해 ‘소형차’로 분류됐기 때문이다. 경차 혜택을 포기하고 덩치를 키운 이 모델은 경차 통계에서 빠져버렸다.
결국 경차 시장을 구원할 투수로 기대받았던 신차가 오히려 경차의 정체성을 버리고 상위 체급으로 ‘신분 세탁’을 한 셈이다. 이는 기존 경차 수요마저 소형 전기차나 소형 SUV로 이탈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기아 2025 모닝 측면 (출처=기아)
압도적 혜택 없다면 부활 어려워
지금의 경차는 애매하다. 연비가 압도적으로 좋은 것도 아니고, 가격이 파격적으로 싼 것도 아니다. 유일한 무기인 각종 세제 혜택마저 전기차나 하이브리드 차량과 겹치면서 빛이 바랬다.
기아 더 뉴 모닝 측정면2 (출처=기아)
단순히 ‘귀여운 디자인’만으로는 깐깐해진 한국 소비자들을 설득하기엔 역부족이다. 경차 규격의 완화나 실질적인 유지비 혜택 강화 같은 특단의 조치가 없다면, 서민들의 발이 되어주던 경차의 시대는 조용히 저물어갈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