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베스트셀링 모델의 심장이었던 3.8리터 6기통 엔진, 기아가 이를 과감히 포기한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단순한 다운사이징을 넘어, 시장과 규제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치밀한 전략이 숨어있었다.
기아가 북미 시장의 핵심 모델인 대형 SUV 텔루라이드의 심장을 교체하는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2027년형 풀체인지 모델을 선보이며, 지난 세대의 성공을 이끌었던 3.8리터 6기통 자연흡기 엔진을 역사 속으로 보낸 것이다. 그 자리는 2.5리터 4기통 가솔린 터보 엔진이 대신한다.
형제차인 현대 팰리세이드가 6기통 엔진을 유지하는 것과 대조적인 행보다. 잘나가던 주력 엔진을 포기한 기아의 선택에 우려가 쏟아졌지만, 시장의 반응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달라진 차체, 주행 성능에 대한 새로운 접근, 그리고 피할 수 없는 규제의 흐름이 이번 변화의 핵심 배경으로 꼽힌다.
잘 나가던 V6, 돌연 단종된 배경
기존 텔루라이드 6기통 모델은 북미 시장에서 이미 성공을 증명한 모델이다. 2025년에만 12만 대 이상 판매되며 기아의 실적을 견인했다. 대형 SUV 시장에서 6기통 엔진이 주는 부드러운 주행감과 상징성은 소비자들에게 여전히 강력한 매력 포인트다.
이런 상황에서 주력 엔진을 4기통으로 바꾸는 것은 위험한 도박처럼 보였다. 실린더 수가 줄어드는 ‘다운사이징’에 대한 소비자의 거부감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았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자 시장의 반응은 예상을 완전히 뒤엎었다. 4기통 터보 엔진을 얹은 신형 텔루라이드는 출시 직후인 지난 2월, 미국 시장에서 전년 같은 달보다 37%나 급증한 판매량을 기록하며 돌풍을 일으켰다.
커진 차체에는 다른 방식의 힘이 필요했다
기아가 6기통 엔진과 결별한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바로 ‘토크’ 특성 때문이다. 2027년형 신형 텔루라이드는 이전 모델보다 차체가 커지고 무게도 120kg 이상 늘어났다. 거대해진 덩치를 효율적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새로운 심장이 필요했다.
기존 3.8리터 6기통 엔진은 최고출력은 291마력으로 높았지만, 최대토크가 높은 회전수에서 발휘되는 자연흡기 방식의 한계를 가졌다. 이는 무거워진 차체로 도심을 주행하거나 오르막길을 오를 때 다소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는 부분이다. 반면 새로운 2.5리터 4기통 터보 엔진은 최고출력은 274마력으로 소폭 낮아졌지만, 낮은 RPM부터 강력한 최대토크를 뿜어낸다. 가속 페달을 밟는 순간부터 즉각적으로 힘을 느낄 수 있어, 일상 주행에서 훨씬 경쾌하고 여유로운 운전이 가능해졌다.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된 다운사이징
강화되는 환경 규제 역시 이번 변화를 이끈 결정적인 요인이다. 특히 미국 캘리포니아주를 중심으로 한층 엄격해진 배출가스 규제 기준을 기존의 대배기량 자연흡기 엔진으로는 충족하기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워졌다.
대형 SUV의 상품성을 유지하면서 까다로운 규제 문턱을 넘기 위해, 직분사 터보 시스템을 활용한 다운사이징은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된 셈이다. 이는 비단 기아만의 움직임이 아니다. 경쟁 모델인 토요타 그랜드 하이랜더, 지프 그랜드 체로키 등도 이미 4기통 터보 엔진을 주력으로 내세우며 시장 변화에 대응하고 있다. 텔루라이드의 변화는 시장의 흐름에 맞춘 현실적인 생존 전략으로 해석된다.
결론적으로 텔루라이드의 엔진 교체는 단순히 잘 팔리던 구성을 버린 무모한 도전이 아니다. 더 커진 차체에 최적화된 주행 성능을 제공하고, 엄격해진 규제 환경에 대응하기 위한 치밀한 진화 과정에 가깝다. 실린더 개수보다 실제 체감 성능과 효율이 더 중요해진 시대의 변화를 성공적으로 증명해낸 셈이다.
서혜지 기자 seog@news-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