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연 9천 대 넘게 팔리던 인기 모델의 쓸쓸한 퇴장.
단순한 판매 부진이 아닌, 기아의 ‘큰 그림’이 숨어 있었다.
한때 합리적인 선택지로 여겨졌던 한 국산 전기 SUV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2018년 첫 등장 이후 8년 만의 일이다. 표면적인 이유는 판매량 급감이지만, 그 배경에는 새로운 인기 모델의 부상과 회사의 생산 전략 대전환이라는 거대한 흐름이 자리 잡고 있다. 과연 이 차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기아는 지난 2026년 3월 10일, 니로 EV의 단산을 공식화했다. 재고가 모두 소진되면 국내 시장에서 더는 볼 수 없게 된다. 정부 보조금과 넓은 실내 공간을 무기로 초기 전기차 시장에서 나름의 입지를 다졌지만, 시간의 흐름을 이기지 못했다.
판매량으로 증명된 세대교체, 주인공은 따로 있었다
어떤 모델의 가치는 결국 시장의 반응, 즉 판매량으로 드러난다. 니로 EV의 하락세는 숫자에서 명확히 나타난다. 2022년 9,194대로 정점을 찍었던 국내 판매량은 2024년 1,388대, 2025년에는 360대까지 급감했다. 그리고 올해 1~2월 판매량은 단 8대에 그쳤다. 사실상 시장의 외면을 받은 셈이다.
초기에는 가성비 전기차로 통했지만, 경쟁은 치열해졌다. 소비자들은 이제 단순히 주행거리만 보지 않는다. 전용 플랫폼 여부, 공간 효율성, 최신 기술 탑재 등 훨씬 더 깐깐한 기준으로 차를 고르기 시작했다. 2세대 모델에서 1회 충전 주행거리를 401km까지 늘렸음에도, 이러한 시장의 변화를 따라잡기엔 역부족이었다.
신형 모델의 등장, 보급형 시장의 판을 바꾸다
니로 EV의 빈자리를 채운 것은 다름 아닌 동생 격인 EV3였다. EV3는 E-GMP라는 전기차 전용 플랫폼을 기반으로 뛰어난 주행거리와 공간 활용성을 선보이며 시장의 판도를 바꿨다. 2025년 한 해에만 21,212대가 팔리며 단숨에 국산 전기차 1위 자리를 꿰찼다. 같은 해 니로 EV 판매량(360대)과 비교하면 약 70배에 가까운 엄청난 격차다.
만약 지난해 보급형 전기 SUV 구매를 고민했다면, 당신의 선택 역시 한쪽으로 기울었을 가능성이 높다. 기아 입장에서는 판매가 급감한 니로 EV를 유지하기보다, 폭발적인 반응을 얻고 있는 EV3에 집중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인 선택이었다. 소비자들의 수요가 어디로 향하는지 명확히 확인된 결과다.
생산 전략의 대전환, 이제는 PBV 시대를 준비한다
단순히 모델 하나를 단종하는 수준이 아니다. 기아의 생산 거점 전략 자체가 바뀌고 있다. 니로 EV를 생산하던 화성 공장은 목적 기반 모빌리티, 즉 PBV(Purpose Built Vehicle) 전용 생산 시설로 대대적인 전환을 진행 중이다. 약 4조 원을 투자해 연 25만 대 생산 체제를 갖추는 거대한 프로젝트다.
이는 기아의 미래가 승용 전기차와 함께 PBV라는 또 다른 축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전기차 캐즘 현상 등 외부 변수에 대응해 전동화 목표를 일부 수정하면서도, PV5와 PV7 같은 새로운 PBV 라인업 확대를 통해 미래 시장을 선점하겠다는 의지다. 이러한 큰 그림 속에서 니로 EV의 단산은 예정된 수순이었던 셈이다.
결론적으로 니로 EV의 퇴장은 한 모델의 실패라기보다 기아 전동화 전략 재편 과정에서 나타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기아의 무게 중심은 이제 EV3를 필두로 한 전용 전기차 라인업과 미래 먹거리인 PBV로 완전히 옮겨갔다. 소비자의 선택지는 더욱 명확해지고 있다.
오종학 기자 fivejh@news-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