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초월해 현대인에게 더 깊은 울림을 주는 스튜디오 지브리의 필모그래피
1초가 멀다 하고 새로운 콘텐츠가 쏟아지는 시대. 자극적인 ‘도파민’의 홍수 속에서 길을 잃었다면, 잠시 멈춰 20여 년 전의 ‘느린 명작’에 눈을 돌려보는 것은 어떨까.넷플릭스가 서비스하는 스튜디오 지브리의 고전들은 단순히 추억을 되새기는 것을 넘어,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감성과 메시지를 담고 있다.
아름다운 비극이 남긴 깊은 상흔, ‘반딧불이의 묘’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의 ‘반딧불이의 묘’(1988)는 2차 세계대전 말, 부모를 잃은 14살 소년 세이타와 4살 여동생 세츠코의 처절한 생존기를 그린다.
영화는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되, 이념이나 역사를 앞세우지 않는다. 대신 전쟁이 한 개인, 특히 가장 약한 아이들의 존엄성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아름답고 서정적인 작화와 대비되는 남매의 비극적 운명은 관객의 마음에 깊은 상흔을 남긴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쉽게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이유다.
한 영화 평론가는 “이 영화의 목적은 반전(反戰) 그 자체가 아니라, 전쟁이라는 거대한 비극 속에서 인간성이 어떻게 소멸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평했다.
생존의 논리가 충돌하는 대서사시, ‘모노노케 히메(원령공주)’
재앙신의 저주를 받은 소년 아시타카의 여정은 인간과 자연의 대립이라는 거대한 담론으로 확장된다.
숲을 파괴해 터전을 일구려는 철의 마을 ‘타타라’와 숲을 지키려는 들개 신과 소녀 ‘산’. 영화는 어느 한쪽을 절대 선이나 악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각자의 생존 논리를 가진 두 집단의 치열한 충돌을 통해 ‘공존은 가능한가’라는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압도적인 스케일과 히사이시 조의 웅장한 음악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스크린을 장악하며, 왜 이 작품이 “애니메이션의 철학적 지평을 넓혔다”고 평가받는지 증명한다.
어른거리는 첫사랑의 잔상, ‘바다가 들린다’
도쿄에서 온 전학생 리카코에게 미묘한 감정을 느끼는 타쿠의 시선을 따라가는 영화는, 극적인 사건 없이 인물들의 사소한 말과 행동, 그리고 그 사이의 ‘거리감’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서툴고 이기적이었지만 그래서 더 현실적이었던 시절의 기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자신의 과거를 자연스럽게 투사하게 만든다.
“모든 것이 반짝였던 그 시절”을 곱씹게 하는, 여백의 미가 돋보이는 수채화 같은 작품이다.
나만의 길을 찾는 이들을 위한 응원가, ‘귀를 기울이면’
‘귀를 기울이면’(1995)은 책을 통해 연결된 소년 세이지에게 자극받아 자신만의 이야기를 쓰기로 결심하는 시즈쿠의 성장을 그린다.
‘Take Me Home, Country Roads’를 개사해 부르는 장면은 꿈을 향한 설렘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감정을 완벽하게 표현하며 영화의 상징으로 남았다.
47세의 나이로 요절한 천재 감독 콘도 요시후미는 평범한 일상 속에 숨겨진 마법 같은 순간들을 포착해, ‘꿈을 향해 나아가는 용기’가 얼마나 소중한지 이야기한다.
시대를 초월한 위로의 아이콘, ‘이웃집 토토로’
시골로 이사 온 사츠키와 메이 자매가 숲의 정령 토토로를 만나 겪는 신비한 경험은, 어른들이 잊고 있던 순수한 동심의 세계로 우리를 이끈다.
영화에는 갈등이나 악당이 없다. 대신 아픈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들의 불안과 그리움을 토토로라는 존재가 따뜻하게 보듬어준다.
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본 자연의 신비와 가족의 사랑은 각박한 현실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가장 순수한 형태의 위안을 안긴다.
이 다섯 작품은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지브리 감성’이라는 하나의 정서로 연결된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깊은 성찰, 꾸밈없는 순수한 시선, 설명보다 조용히 스며드는 감정의 여백, 그리고 상실을 통해 성장하는 인물들의 모습은 지브리 작품을 관통하는 핵심이다. 히사이시 조의 서정적인 음악과 바람 소리, 매미 소리 같은 자연의 음향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시적인 연출은 디지털 시대에 우리가 잃어버린 감각을 일깨운다.
오늘 밤, 잠시 리모컨을 멈추고 이 느리고 깊은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여 보자. 잊고 살았던 어떤 소중한 감정이 당신의 마음을 두드릴지도 모른다.
이지희 기자 jeehee@news-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