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신경·기억이 만들어낸 ‘향 민감성’의 과학
이 글에서는 향기에 민감한 이유가 무엇인지, 전문가들의 견해를 통해 보다 깊이 있게 살펴봅니다.
후각의 유전적 차이가 ‘향수 두통’을 만든다
인지심리학자 파멜라 달튼 박사는 “사람마다 맡는 향의 구성 요소가 다르게 느껴질 수 있다”며 “같은 향수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부드럽게 느껴지지만, 다른 사람은 특정 자극만 강하게 받아들이기도 한다”고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머스크 향을 전혀 맡지 못하는 무후각증을 가지고 있는 반면, 또 다른 사람은 그 향을 지나치게 강하게 인식해 불쾌함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이런 개인차는 향수 반응이 얼마나 주관적인지를 보여줍니다.
두통을 유발하는 진짜 원인: 후각이 아닌 ‘삼차신경 자극’
삼차신경은 코 안의 통증·온도·압력을 감지하는 신경으로, 강한 화학 향이나 멘톨, 합성 향료는 이 신경을 자극해 따갑고 쏘는 느낌, 두통, 구역감을 만들 수 있습니다.
스탠퍼드 의대의 자라 파텔 교수는 “강한 방향제나 향수를 맡으면 즉각적인 편두통이 생긴다”며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기도 했습니다.
즉, 향기에 민감한 사람들은 실제로 신경학적 자극에 더 취약한 구조를 갖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냄새에 반응하는 우리의 감정…기억이 만든 ‘향 싫증’
향기는 감정을 관장하는 편도체와 해마(기억 중추)에서 함께 처리됩니다.그래서 향은 다른 감각보다 기억과 정서에 더 깊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달튼 박사는 “좋고 나쁨의 판단은 향 자체보다 그 향이 떠올리게 하는 경험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고 강조합니다.
향수 브랜드 공동창립자 줄리아 카힐리-가루바 역시 “프랑킨센스나 미르 향은 종교적 의식의 기억을 떠올리게 해 어떤 사람에게는 편안하지만, 또 어떤 사람은 긴장을 느낀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파촐리, 머스크, 장미·자스민 같은 빈티지 플로럴은 세대에 따라 강렬한 향수(향의 기억)로 작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문화·세대·지역에 따라 달라지는 향기 취향
-베이비붐·X세대: 은방울꽃 같은 ‘클래식 플로럴’
-밀레니얼 세대: 바닐라·통카빈 등의 ‘구르망 계열’
-중동·남아시아 지역: 오드, 로즈, 샌달우드 중심의 향
-남미 지역: 달콤하고 과일 향 선호
2022년 발표된 글로벌 연구에서는 바닐라와 과일향은 대부분의 인구에서 보편적으로 ‘기분 좋은 냄새’로 평가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는 향 선호도에 생물학적 기반 역시 존재함을 보여줍니다.
향 민감자를 위한 ‘부담 없는 향’ 선택법
향에 민감하다면 삼차신경을 자극하지 않는 ‘부드러운 향’을 고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추천한 안전한 향 종류는 다음과 같습니다.-바닐라: 전 세계적으로 가장 편안한 향
-라이트 플로럴: 은방울꽃, 부드러운 오스만투스
-시트러스: 레몬·베르가못 중심의 가벼운 향
-앰버·머스크의 약한 농도
-비누향·클린향: 깨끗하고 중립적인 느낌
향 민감성이 있다면 향수 매장에서 바로 구매하지 말고, 직접 피부에 뿌린 뒤 2~3일 동안 일상 속에서 테스트하는 것이 좋습니다. 피부 화학반응이나 세탁 세제, 보디크림 등에 따라 착향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향기는 단순한 취향을 넘어, 유전·신경·기억·문화가 결합해 만들어지는 매우 개인적인 경험입니다. 어떤 향이 불편하다면 이는 결코 예민함이 아니라 ‘당신의 신경 시스템이 보내는 자연스러운 신호’일 뿐입니다.
다행히 향의 세계는 폭넓고, 누구나 편안하게 느낄 선택지가 있습니다. 나만의 감각을 존중하면서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향을 찾는 것, 그것이 결국 우리 몸과 마음에 가장 건강한 방식의 향 사용법일 것입니다.
이서윤 기자 sylee@news-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