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올해의 차’ 명성도 소용없었다…르노 세닉, 999대 한정 전략의 뼈아픈 실패
‘2024 유럽 올해의 차’ 수상, 국내 기자단의 ‘9월의 차’ 선정 등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등장한 르노 세닉 E-Tech. 올해 단 999대만 판매한다는 ‘한정판’ 마케팅까지 내세우며 흥행 돌풍을 예고했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본 성적표는 처참하다. 출시 두 달간 판매량은 고작 88대. 시장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이 야심 찬 SUV는 어쩌다 ‘찻잔 속 태풍’으로 전락하고 만 것일까?
999대의 자신감, 100대도 못 채운 현실
르노코리아가 지난 8월 21일 세닉을 출시하며 내건 ‘999대 한정 판매’ 전략은 소비자의 구매욕을 자극해 단기간에 완판을 이끌어내려는 야심 찬 승부수였다. 희소성을 무기로 시장의 이목을 집중시키겠다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르노 세닉 E-Tech 상부 (출처=르노)
세닉은 출시 첫 달인 8월 38대, 9월에는 50대가 팔리는 데 그쳤다. 두 달 누적 판매량이 88대로, 999대의 10%에도 미치지 못하는 초라한 성적이다. 같은 기간 시장의 절대 강자로 떠오른 기아 EV3가 9월에만 1,927대, 10월에는 2,107대를 팔아치운 것과 비교하면 격차는 더욱 뼈아프게 다가온다. 심지어 한 체급 아래인 현대 코나 일렉트릭(9월, 702대)과 비교해도 14분의 1 토막 수준이다. ‘한정판’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만큼 시장은 냉정했다.

르노 세닉 E-Tech 측후면 (출처=르노)
가장 큰 패인, 소비자를 설득하지 못한 ‘가격표’
세닉의 실패 요인으로 가장 먼저 꼽히는 것은 단연 ‘가격’이다. 세닉의 시작 가격은 5,159만 원. 여기에 정부 보조금 443만 원과 지자체 보조금을 더해도 실구매가는 4천만 원 중반대에 형성된다. 물론 프랑스 현지보다 저렴하게 책정됐고, 유럽 감성의 디자인과 넓은 실내 공간 등 장점도 분명하다.
르노 세닉 E-Tech 상부 (출처=르노)
하지만 경쟁자들은 너무나도 강력했다. 기아 EV3는 시작가 3,995만 원에 보조금을 적용하면 실구매가가 2천만 원대 후반에서 3천만 원대 초반까지 떨어진다. 소비자 입장에선 1천만 원 이상 저렴하면서도 ‘2025 세계 올해의 차’에 선정될 만큼 상품성을 인정받은 국산 전기차를 외면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세닉의 ‘프리미엄 감성’이 1천만 원의 가격 차이를 뛰어넘을 만큼 매력적이지 못했다는 냉정한 평가가 지배적이다.
애매한 위치, 통하지 않은 ‘유럽 감성’
세련된 디자인과 친환경 소재, ‘솔라베이 파노라믹 선루프’ 같은 독특한 사양은 분명 세닉만의 강점이다. 하지만 한국 전기차 시장은 ‘가성비’를 앞세운 대중적인 모델과 확실한 브랜드 파워를 가진 ‘프리미엄’ 모델로 양분되어 있다. 세닉은 이 두 경계 사이에서 애매한 위치에 놓이고 말았다.
르노 세닉 E-Tech 실내 (출처=르노)
화려한 수상 경력과 야심 찬 마케팅에도 불구하고 르노 세닉의 초반 실패는 국내 전기차 시장이 얼마나 가격에 민감하고, 또 얼마나 냉정한지를 다시 한번 일깨워주고 있다.
이석호 기자 shlee@news-wa.com